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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기억해두고 싶은 생각들

실패를 통과하는 일 (2) 최악에 대한 가정

by 브라이티 2025. 11. 26.
영원을 꿈꾸던 널 떠나보내고
슬퍼하던 날까지도 떠나보냈네
오늘의 나에게 남아있는 건
피하지 못해 자라난 무던함뿐야

그곳의 나는 얼마만큼 울었는지
이곳의 나는 누구보다 잘 알기에
후회로 가득 채운 유리잔만
내려다보네

아 뭐가 그리 샘이 났길래
그토록 휘몰아쳤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될 거야

- 한로로 '사랑하게 될거야' 가사

 

https://www.youtube.com/watch?v=f1sr0D13wEY

 

 

10월 중순, 우연히 이  '사랑하게 될거야' 라는 노래를 처음 듣게 되었다.

듣는 내내, 나의 떨어진 논문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슬퍼하던 날까지도 떠나보냈네',

'남아있는 건 피하지못해 자라난 무던함뿐야',

'그곳의 나는 얼마만큼 울었는지 이곳의 나는 누구보다 잘 알기에' 

 

노래의 가사들이 내 마음에 앉아 나의 아픈 곳을 콕콕 찔렀다.

 

10월 중순의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논문이 떨어진 이후, 나는 해당 연구에 대한 '철수'를 선언하고 이를 마무리하는 묻어주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죽은 사람을 묻어 보내주는 것처럼, 나는 나의 죽은 논문에 대한 장례를 치루고 있었던 것이다. 교수님, 그리고 심지어는 다른 저자들까지 모두의 관심이 떠난 상태에서, 나만 남아 해당 논문의 저널 제출 준비를 진행했다.

 

AI 분야에서는 (타 분야와 달리) 저널이 아닌 컨퍼런스에 주로 연구 논문을 제출하고, 컨퍼런스를 중심으로 실적을 취급한다. 저널과 해당 저널의 IF 를 보기보다, 어떤 컨퍼런스에 게재된 논문인지를 보는 것이다. 우수한 연구들 자체가 애초에 컨퍼런스에 게재된다. 저널은 졸업 요건 혹은 한국 연구재단 실적 인정 요건 정도에서만 취급해주는 것 같다. 나의 떨어진 논문은, 그동안 쏟은 노력을 생각하면 아무 곳에도 게재를 안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에서, 교수님 및 다른 팀원들과의 협의 하에 저널에 제출하며 마무리하기로 결론내려진 상태였다. 사실 저널은 나도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는 제출처였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마음 한편이 참으로 찝찝했다. 그러나, 이 논문을 다시 전력 다해서 연구하기에는 내가 애정도, 자신도, (혹은 실력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10월 초-중순을 저널 제출용 논문 작성을 하며 보냈다. 저널용 제출 논문은 훨씬 작성해야하는 것도 많고 까다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널은 컨퍼런스와 달리 정해진 게재 승인 확정 (Acceptance Notification) 일자가 없고, 일반적으로 게재 확정까지의 기간이 굉장히 길다고 알려져있었기 때문에, (보통 6개월 이상이라고 한다.) 너무나 사기가 저하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졸업을 위해 논문이 하나 이상 꼭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이렇게 심사 기간이 길어진다는 말은 곧 이 논문을 나의 졸업 요건으로 쓸 생각은 애초에 갖다 버려야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만약 게재가 승인된다고 하더라도, 교수님 실적으로나 겨우 인정받게 되는 것이지 내게 단기적인 유익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여러차례 마음을 다잡고 오버리프로 논문을 작성해나갔다. 작성하면서 이전 (떨어진 버전의) 논문을 다시 제대로 읽어보았는데, 정말 형편없었다. 이렇게 형편없는 라이팅을 해두고 애초에 승인될 기대를 했다는 자체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기존 논문에서는 메소드 자체보다 라이팅에서 큰 오류가 많았기에,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논문 라이팅 상태로 그대로 또 저널에 낼 수는 없었기에, 이번에 저널 제출을 준비하며 라이팅도 전반적으로 갈아엎고 새로 작성해야했는데, 그래서 (단순 글자 옮기기가 아니어서) 더 논문 작업이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러는 한편, 연구실의 다른 프로젝트 팀들에서는 한창 다음 베뉴 (Venue) 인 CVPR 을 바라보며(목표로 하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CVPR 은 공식적으로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저 그들을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 10월 중순에서 말로 넘어가던 어느날 문득 위 '사랑하게 될거야' 노래를 듣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메인 실험 결과 없는 저들도 CVPR 을 제출하기 위해 준비하는데, 나(연구)도 한번 내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못할게 뭐야?" 라는 생각 말이다. 아무도 내 연구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서포트도 해주지 않지만, 한번 나 혼자 최선을 다해서 다시 도전해보기로 이때 마음 속 굳은 결심이 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논문)를 사랑하고 사랑하게 될거야.

 

사실 논문이 떨어진 직후에는 내 연구가 꼴도 보기 싫었다. 며칠 후에는 암담하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순조롭게 진행될 것만 같던 나의 졸업 계획이 이렇게 어긋나는구나, 이렇게 내 졸업은 불확실 속에 빠지게 되는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졸업 문제를 떠나, 큰 낙심으로 인해 상한 마음을 회복하기 어려웠고 나 자신에게 너무 실망스러웠다. 더군다나, 논문 리젝 통보를 받기 하루 전, 길에서 크게 넘어져 고생을 꽤 하고 지금은 손과 팔목에 큰 흉터가 생겼는데 이 흉터를 볼 때마다 논문 리젝이 떠올랐다.  

 

 

그러나 10월 중순 즈음에 이르러서는 나는 이 논문에 대해 슬픔-좌절-분노의 단계를 거쳐 체념에 이르렀고, 위 노래를 듣고는 '화해'를 결심했던 것 같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우스갯소리로 말하길, 나는 슬픔-좌절-분노-체념을 거쳐 '화해'의 단계에 왔다고 이야기했다. 정말 그랬던 것 같다. 이제는 이 논문과 내가 '화해'해야겠다는 생각이 노래를 들으면서 강하게 들었던 것 같다.

 

 

처음 한 주 동안에는 아무에게도 이 결심을 말하지 않고, 나 혼자 다시 논문 모드에 돌입해 메소드 재설계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다시 제대로 VSCode 코드 창을 들여다보며, 기존 데이터와 코드를 정리하는 작업부터 찬찬히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 주 뒤에는 교수님께도 제대로 말씀드리고, 제출 준비를 시작했다. 이번 제출 때는 지난번과 달리 나를 도와줄 여력이 있는 팀 멤버들이 없었다. 오롯이 나 혼자 해내야만 했다. 논문 리젝 이후 암담함 (=미래가 없음)을 제대로 느껴보니, 이번 제출 때는 정말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마저 떨어진다면, 나는 막다른 길에 놓인 처지가 될 것이었다. 그래서, 정말 필사적으로, 비장하게 마음을 다잡고 하루하루 연구에 임했다. 이전과 달리 정말 나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준비해야했었기에, 더욱 책임감을 갖고 글자 하나 수치 하나 내가 모두 확인하며 꼼꼼히 진행하고자 했다. 지난번의 아쉬움따윈 남지 않도록, 혹 실패하더라도 '나는 내 최선을 다했기에 미련이 없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을 큰 목표로 삼았다.

 

논문 제출을 준비하며 지난번 제출 때의 내 마음가짐을 많이 돌아봤는데, 결론적으로는 참 내가 (여러모로) 교만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다른이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그리고 나의 똑똑함을 내 힘으로 증명해보이겠다는 다소 교만한 생각들이 기저에 있었던 것 같다. 많이 반성했다. 그리고 이번 논문 제출을 준비하며 지난번 (1)편에서 언급한 그 '실패를 통과하는 일' 이라는 책을 시간날 때마다 읽어왔는데, 그 책에서 '최악의 상황을 미리 생각해보고 대비해놓으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라는 대목을 읽고 나도 나의 최악의 상황도 그려봤다. 내게 최악의 상황이라 함은, 곧 3번째 리젝이 될 것이다. 사실 내 최악의 상황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닌, 내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대비 혹은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생각해봄으로써, 지난번과 같은 낙심은 겪지 않고자 멘탈 관리에 힘썼다.

 

 

그렇게, 나는 이 논문을 3번째 제출했다. 이 글은 Main Paper 와 Supplementary 제출까지 모두 마친 뒤 지난 한 달을 회고하며 작성하는 글이다. 오픈리뷰의 Author Console 에 컨퍼런스가 3개나 리스트업이 되어있는 것을 보니(=3번=3곳에 제출했다는 의미이다.), 이 논문과 함께한 나의 올 한해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듯했다. 이번 학회의 리뷰는 1월달에 나온다고 한다. 그때까지는 별 기대없이, 다른 연구에 전념하며 지내보고자 한다. 과연 노래의 가사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화해하게될까?

 

+) 여담으로 메인페이퍼 제출 일주일 전부터는 잠을 하루에 3-4시간 자며 버티듯이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너무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약국에서 감기약과 (인생 첫) 쌍화탕까지 사서 복용하며 악착같이 버텼는데, 정말 매일 아침마다 '죽을 것 같아'를 외치며 일어났던 것 같다.